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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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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公事) 제2장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007-05-09 (수) 18:20 조회 : 6410

                                                                        공사(公事) 제2장 

1. 상제께서 정미년 三월 초에 광찬을 대동하고 말점도(末店島)에 들어가시려고 (광찬의 재종이 말점도에서 어업을 경영하고 있었음) 갑칠과 형렬을 만경 남포(南浦)에 불러 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지금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지공사로 인하여 정배됨이니 너희들은 성백(成伯)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四十九일 동안 하루에 짚신 한 켤레와 종이등 한 개씩을 만들라. 그 신을 천하 사람에게 신게 하고 그 등으로 천하 사람의 어둠을 밝히리라" 하셨도다. 두 사람은 명을 받들어 성백의 집에 가서 그대로 시행하였도다. 그 후 상제께서 말점도로부터 나오셔서 그 짚신을 원평 시장에 가서 팔게 하시고 그 종이등에는 각기 "음양(陰陽)"두 글자를 쓰셔서 불사르시니라. 

2. 또 백지로 고깔을 만들어 마장군(馬將軍)이라 써서 문위에 걸고 한아름쯤 되게 묶어 인경을 만들어 방 가운데에 달아 매고 백지를 바른 다음에 二十四방위 자를 둘러 쓰고 그 글자 사이에 다른 글자를 써 넣고 또 그 위에 백지를 오려서 비늘을 달아 붙이시니 그 모형이 마치 철갑옷과 같아지니라. 그 자리에 형렬, 공신, 광찬, 장근, 응종, 원일, 도삼, 갑칠, 그 외 몇 사람이 있었도다. 

3. 또 상제께서 장근으로 하여금 식혜 한 동이를 빚게 하고 이날 밤 초경에 식혜를 큰 그릇에 담아서 인경 밑에 놓으신 후에 "바둑의 시조 단주(丹朱)의 해원도수를 회문산(回文山)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붙여 조선 국운을 돌리려 함이라. 다섯 신선 중 한 신선은 주인으로 수수방관할 뿐이오. 네 신선은 판을 놓고 서로 패를 지어 따먹으려 하므로 날짜가 늦어서 승부가 결정되지 못하여 지금 최 수운을 청하여서 증인으로 세우고 승부를 결정코자 함이니 이 식혜는 수운을 대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시고 "너희들이 가진 문집(文集)에 있는 글귀를 아느냐"고 물으시니 몇 사람이 "기억하는 구절이 있나이다"고 대답하니라. 상제께서 백지에 "걸군굿 초란이패 남사당 여사당 삼대치"라 쓰고 "이 글이 곧 주문이라. 외울 때에 웃는 자가 있으면 죽으리니 조심하라" 이르시고 "이 글에 곡조가 있나니 만일 외울 때에 곡조에 맞지 않으면 신선들이 웃으리라" 하시고 상제께서 친히 곡조를 붙여서 읽으시고 종도들로 하여금 따라 읽게 하시니 이윽고 찬 기운이 도는지라. 상제께서 읽는 것을 멈추고 "최 수운이 왔으니 조용히 들어보라"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인경위에서 "가장(家長)이 엄숙하면 그런 빛이 왜 있으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니 "이 말이 어디에 있느뇨"고 물으시니라. 한 종도가 대답하기를 "수운가사(水雲歌詞)에 있나이다." 상제께서 인경 위를 향하여 두어 마디로 알아듣지 못하게 수작하셨도다. 

4. 상제께서 어느 날 가라사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뒤 감당을 못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신명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 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시 천하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 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 주어서 역사케 하고자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 만일 '인'자까지 붙여 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자를 너희들에게 붙여 주노니 잘 지킬지어다"고 이르시고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 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 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 하셨도다. 

5. 상제께서 대신명(大神明)이 들어설 때마다 손을 머리 위에 올려 예를 갖추셨도다. 

6. 상제께서 "청주(淸州)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 하시고 청도원 류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 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그 때에 김송환이 그 시종을 들었느니라. 

7. 상제께서 정미년 四월 어느 날 돈 천냥을 백남신으로부터 가져오셔서 동곡에 약방을 차리시는데 이 때 약장과 모든 기구를 비치하시기 위하여 목수 이경문(李京文)을 불러 그 크기의 치수와 만드는 법을 일일이 가르치고 기한을 정하여 끝마치게 하시니 약방은 갑칠의 형 준상의 집에 설치하기로 하셨도다. 

8. 목수가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기에 상제께서 목수로 하여금 목재를 한곳에 모아놓게 하고 앞에 꿇어앉힌 후 크게 꾸짖고 봉서 하나를 목수에게 주고 꿇어앉은 그대로 불사르게 하시니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는지라. 목수가 두려워서 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속히 마치라" 독려하시니라. 그 목수가 수전증이 나서 한 달이 넘은 후에 겨우 일을 끝내니라. 약방을 차린 후 상제께서 공우에게 "천지의 약기운은 평양에 내렸으니 네가 평양에 가서 당제약을 구하여 오라"고 명하셨도다. 그 후에 다시 그에 대한 말씀이 없으시고 그날 밤에 글을 써서 불사르셨도다. 

9. 약방을 설치하신 후 '원형이정 봉천지 도술약국 재전주동국 생사판단(元亨利貞 奉天地 道術藥局 在全州銅谷 生死判斷)'이란 글귀를 쓰셔서 불사르셨도다. 약장은 종삼 횡오 도합 십오 칸으로 하고 가운데에 큰 칸이 둘 아래로 큰 칸이 하나이니라. 상제께서는 그 위 십오칸 중의 가운데 칸에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쓰고 그 속에 목단피를 넣고 그 아래에 '열풍뇌우불미(烈風雷雨不迷)'라고 횡서하고 또 칠성경을 백지에 종서하고 그 끝에 '우보상최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라 횡서하고 약장 위로부터 뒤로 밑판까지 따라서 내려 붙이고 그 위에 '양정 유월 이십일 음정 유월 이십일(陽丁 六月 卄日 陰丁 六月 卄日)'이라 쓰시니라. 궤 안에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 쓰고 그 글자 위에 '설문(舌門)' 두 자를 낙인하신 후 그 글자 주위에는 二十四점을 홍색으로 찍고 약방에 통감(通鑑) 서전(書傳) 각 한 질씩 비치하셨도다. 

10. 상제께서 병욱에게 명하시어 전주에 가서 삼백 냥으로 약재를 사오게 하셨는데 마침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이 비는 곧 약탕수(藥湯水)라고 이르셨도다. 

11. 상제께서는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공우와 광찬에게 주고 가라사대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 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 하시니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이로부터 몇 해 지난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불전을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니 미륵전 앞이 넓어지느니라. 이 불전이 오늘날의 대장전이로다. 

12. 상제께서 용두리 주막에 계실 때 광찬에게 한방의서(漢方醫書) 방약합편(方藥合編)을 사오게 하시고 "네가 병욱의 집에 가서 주묵(朱墨)으로 이 책 중에 있는 약명에 비점을 찍으라" 이르시니 광찬이 명대로 시행하여 올리니 상제께서 열람하시고 그 책을 불사르셨도다. 

13. 상제께서 농암에서 공사를 행하실 때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허미수(許眉쇪)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의 일만 이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金剛山)일만 이천봉은 겁기가 붙어 있으니 이제 그 겁기를 제거하리라" 하시고 "네가 김광찬, 신원일과 함께 백지 일방촌씩 오려서 시(侍)자를 써서 네 벽에 붙이되 한 사람이 하루 사백자씩 열흘에 쓰라. 그리고 그 동안 조석으로 청수 한 동이씩 길어 스물네 그릇으로 나누어 놓고 밤에 칠성경(七星經) 삼칠편을 염송하라" 명하시니라. 형렬은 명을 좇았으되 신원일이 즐거이 행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 아뢰이니 상제께서는 "정읍 이도삼을 불러서 행하라" 분부하시니라. 형렬은 그를 데려다가 열흘동안 분부대로 행한 후에 김갑칠을 보내어 일을 마쳤음을 상제께 아뢰게 하였더니 상제께서 갑칠에게 양(羊)한마리를 사 주며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14. 상제께서 십일 월에 사기를 옮기는 공사를 보시고자 동곡에 돌아오셔서 전일에 주었던 양을 잡게 하고 그 양 피를 손가락 끝에 묻혀 일만 이천 시(侍)란 글자에 바르시니 양 피가 다한지라. 상제는 "사기(沙器)를 김제(金堤)로 옮겨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때 김제 수각(水閣) 임상옥(林相玉)이 왔기에 상제께서 청수를 담던 사기 그릇을 개장국에 씻어 그에게 주시니라. 그는 영문을 모르고 주시는 대로 그 그릇을 받았도다. 그는 며칠 후에 그 사기 그릇의 용처를 여쭈었더니 "인부를 많이 모아 일할 때 쓰라" 하셨도다. 

15. 상제께서 십일 월에 동곡에 머무시면서 금강산 공사를 보고 형렬에게 "내가 삭발하리니 너도 나를 따라 삭발하라"고 분부하시나 형렬이 속으로 달갑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나 부득이 응락하니라. 또 갑칠을 불러 "내가 삭발하리니 내일 대원사에서 가서 중 금곡을 불러 오라" 하시므로 형렬은 크게 근심하였으되 이튿날 다시 그것에 대한 말씀이 없었도다.

16. 상제께서 어느 날 후천에서의 음양도수를 조정하시려고 종도들에게 오주를 수련케 하셨도다. 종도들이 수련을 끝내고 각각 자리를 정하니 상제께서 종이 쪽지를 나누어주시면서 "후천 음양도수를 보려 하노라. 각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점을 찍어 표시하라"고 이르시니 종도들이 마음에 있는 대로 점을 찍어 올리니라.

응종은 두 점, 경수는 세 점, 내성은 여덟 점, 경석은 열두 점, 공신은 한 점을 찍었는데 아홉 점이 없으니 자고로 일남구녀란 말은 알 수 없도다"고 말씀하시고 내성에게 "팔선녀란 말이 있어서 여덟 점을 쳤느냐"고 묻고 응종과 경수에게 "노인들이 두 아내를 원하나 어찌 감당하리요"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후천에서는 새로운 기력이 나지 아니하리까"고 되물으니 "그럴 듯하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무슨 아내를 열둘씩이나 원하느뇨"고 물으시니 그는 "열두 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고 대답하니 이 말을 듣고 상제께서 다시 "그럴 듯하도다"고 말씀을 건너시고 공신을 돌아보면서 "경석은 열둘씩이나 원하는데 너는 어찌 하나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오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 일양이 원리인 줄 아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너의 말이 옳도다"고 하시고 공사를 잘 보았으니 "손님 대접을 잘 하라"고 분부하셨도다. 공신이 말씀대로 봉행하였느니라. 상제께서 이 음양도수를 끝내고 공신에게 "너는 정음 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고 분부하시고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고 일러주셨도다. 

17. 종도들의 음양도수를 끝내신 상제께서 이번에는 후천 五만년 첫 공사를 행하시려고 어느 날 박공우에게 "깊이 생각하여 중대한 것을 들어 말하라" 하시니라. 공우가 지식이 없다고 사양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아뢰기를 "선천에는 청춘과부가 수절한다 하여 공방에서 쓸쓸히 늙어 일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 불가하오니 후천에서는 이 폐단을 고쳐 젊은 과부는 젊은 홀아비를, 늙은 과부는 늙은 홀아비를 각각 가려서 친족과 친구들을 청하고 공식으로 예를 갖추어 개가케 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아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네가 아니면 이 공사를 처결하지 못할 것이므로 너에게 맡겼더니 잘 처결하였노라"고 이르시고 "이 결정의 공사가 오만년을 가리라"고 말씀하셨도다. 

18. 十二월 초하룻 날 부인은 상제의 분부대로 대흥리에서 백미 한 섬을 방에 두고 백지로 만든 고깔 二十여개를 쌀 위에 놓고 종이에 글을 써서 불사르니라. 이 때 상제께서 "불과 물만 가지면 비록 석산바위 위에 있을지라도 먹고 사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그 백미로 밥을 지어 이날 모인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셨도다. 

19. 상제께서 十二월에 들어서 여러 공사를 마치시고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도다. 경석, 광찬, 내성은 대흥리로 가고 원일은 신경원의 집으로 형렬과 자현은 동곡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남아 있는 문공신, 황응종, 신경수 들에게 가라사대 "경석은 성(誠) 경(敬) 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고 일러주시고 또 "본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 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신명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 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 하시고 종이에 글을 쓰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훗날에 보라. 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보다 많아지리라. 풀어 두어야 후천에 아무 거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맺으셨도다. 

20. 상제께서 "선천에서 삼상(三相)의 탓으로 음양이 고르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거주성명 서신사명 좌상 우상 팔판 십이백 현감 현령 황극 후비소(居住姓名 西神司命 左相 右相 八判 十二伯 縣監 縣令 皇極 後妃所)"라 써서 광찬에게 "약방의 문지방에 맞추어 보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일이 헛 일이라"고 말씀하시기에 경학이 "여백을 오려버리고 글자 쓴 곳만 대여 보는 것이 옳겠나이다"고 말하기에 그대로 행하니 꼭 맞으니라. 

21. 한번은 상제께서 임상옥에게 사기 그릇을 주신 뒤에 공우를 대동하고 전주로 가시는 도중에 세천에 이르시니 점심 때가 되니라. 공우가 상제를 고송암(高松菴)의 친구 집에 모시고 상제께 점심상을 받게 하였도다. 상제께서 문득 "서양기운을 몰아 내어도 다시 몰려드는 기미가 있음을 이상히 여겼더니 뒷 골방에서 딴전 보는 자가 있는 것을 미처 몰랐노라" 하시고 "고 송암에게 물어 보고 오너라"고 공우에게 이르시고 칠성경에 문곡(文曲)의 위치를 바꾸어 놓으셨도다. 

22. 상제께서 최익현과 박영효(朴泳孝)의 원을 풀어 주신다고 하시면서 "천세천세 천천세 만세만세 만만세 일월 최익현 천포천포 천천포 만포만포 만만포 창생 박영효(千歲千歲 千千歲 萬歲萬歲 萬萬歲 日月 崔益鉉 千胞千胞 千千胞 萬胞萬胞 萬萬胞 蒼生 朴泳孝)라 쓰고 불사르셨도다. 

23. 상제께서 만국 창생들의 새 생활 법으로써 물화상통을 펼치셨도다. 종도들이 상제의 명을 좇아 공신의 집에서 밤중에 서로 번갈아 그 집의 물독 물을 반 바가지씩 퍼내 우물에 쏟아 붓고 다시 우물물을 반 바가지씩 독에 붓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여러 우물과 독의 물을 번갈아 바꾸어 갈아 부었도다. 

24. 신원일이 개벽공사를 빨리 행하시기를 상제께 간청하니라. 상제께서 "인사는 기회가 있으며 천시는 때가 있으니 그 기회와 때를 기다릴 것이니 이제 기회와 천시를 억지로 쓰면 그것은 천하에 재화를 끼치게 될 뿐이며 억조의 생명을 억지로 앗아가는 일이 되리라. 어찌 차마 행할 바이냐"고 말씀하셨으되 원일이 "방금 천하가 무도하여 선악을 분별하기 어려우니 속히 이를 잔멸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주시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말하면서 간청하니 상제께서 심히 괴로워 하셨도다. 

25. 공신의 집에서 또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 뒤에 전쟁이 있겠느냐 없겠느냐"고 물으시니 혹자는 있으리라고 하고 혹자는 없으리라고 아뢰니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천지 개벽시대에 어찌 전쟁이 없으리오"라고 하시고 전쟁기구를 챙겨 보신다면서 방에 있는 담뱃대 二十여개를 거두어 거꾸로 모아 세우고 종도들로 하여금 각기 수건으로 다리와 머리를 동여매게 하시고 또 백지에 시천주를 써서 심을 부벼 불을 붙여 들게 하고 문창에 구멍을 뚫어 놓은 다음에 모두 담뱃대를 거꾸로 매게 하고 "행오를 잃으면 군사가 상하리라" 이르고 종도들로 하여금 뒷문으로 나가서 부엌으로 돌아와서 창 구멍에 담뱃대를 대고 입으로 총소리를 내게 하고 다시 변소로 돌아와서 창 구멍에 담뱃대를 대고 다시 총 소리를 내게 하고 또 헛청으로 돌아들어 그와 같이하되 궁을(弓乙)형을 지어 빨리 달리게 하니 늙은 사람이 씨근덕 거리더라. 다시 상제께서 이르시기를 "이 말세를 당하여 어찌 전쟁이 없으리오. 뒷날 대전쟁이 일어나면 각기 재조를 자랑하리니 재조가 월등한 나라가 상등국이 되리라." 이 공사가 끝나자 천고성이 사방에서 일어났도다. 

26. 그리고 그림을 그려 문 공신의 집 벽에 붙이고 이를 정의도(情誼圖)라고 이름 하셨도다. 

27. 무신년 七월에 이르러 상제께서 원일을 이끄시고 부안 변산 우금암(遇金岩)아래에 있는 개암사(開岩寺)에 가시니라. 그 때 상제께서 원일에게 삶은 쇠머리 한 개와 술 한 병과 청수 한 그릇을 방안에 차리고 쇠머리를 청수 앞에 진설하게 하신 후에 원일을 그 앞에 꿇어 앉히고 성냥 세 개비를 그 청수에 넣으시니라. 이 때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나고 홍수가 창일하는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이제 청수 한 동이에 성냥 한 갑을 넣으면 천지가 수국(水國)이 될지니라. 개벽이란 이렇게 쉬우니 그리 알지어다. 만일 이것을 때가 이르기 전에 쓰면 재해만 끼칠 뿐이니 그렇게 믿고 기다려라"고 일러주시고 진설케 하신 것을 모두 거두니 곧 풍우가 그쳤도다. 

28. 상제께서 원일을 곧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도다. 원일이 집에 돌아와서 보니 자기 동생의 집이 폭우에 파괴되고 그 가족은 원일의 집에 피난하였도다. 원래 원일의 아우는 상제를 믿지 아니하였으며 언제나 불평을 품었도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당한 후부터 두려워서 무리한 언사를 함부로 쓰지 아니하였도다.


 
 
운영자 2009-06-01 (월) 03:38
 

烈風雷雨不迷 열풍뇌우불미 禹步相催登陽明 우보상최 등양명


1. 烈風雷雨不迷 열풍뇌우불미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의 하나인 『 서경(書經) 』에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를 선양하는 것에 대해 나오고 있다.


요임금은 어질기가 하늘과 같고 지혜가 신과 같아 그 큰 덕을 밝히어 백성을 다스리니 온 나라가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되니 바야흐로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어느덧 요임금은 나이가 들어 몸도 노쇠해졌고 더구나 유례없는 대홍수가 일어나 온 세상을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요임금은 자신의 뒤를 이어 능히 홍수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후계자를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여러 신하를 불러 모으고 각기 천하를 다스릴만한 덕(德) 있는 선비를 추천하기를 명하였다. 방제라는 신하가 요임금의 큰 아들인 단주(丹朱)를 추천하였으나 불초하다하여 요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두라는 신하가 공공이란 인물을 거론하였으나 그 역시 적합하지가 않았다. 사악이란 신하가 곤이란 사람을 등용할 것을 간하기에 요임금이 시험 삼아 홍수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역시 감당을 하지 못하였다.


실의에 빠져 있는 요임금에게 뭇 신하들이 어떤 현인(賢人)을 추천하였는데 그가 바로 우순(虞舜)이었다. 요임금은 과연 순이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인가 알아보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하였다. 먼저 아황과 여영이라는 두 딸을 시집보내 그가 능히 두 부인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순은 능히 가정을 화목하게 다스렸을 뿐 아니라 벼슬자리에 오른 뒤 요임금의 명을 받아 백성들로 하여금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하였으며 문무백관의 질서를 바로잡으니 그 덕이 천하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요임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천자가 되려면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의지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요임금은 대록이란 밀림에 순을 보내 홍수피해상황을 알아오게 하였다. 대록은 지금의 하북성 거록현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온갖 맹수와 독충들이 우글거렸으며 기상이변이 심해 그 누구도 가기를 꺼려했던 곳이었다.


순은 기꺼이 명을 받들어 대록으로 떠났다. 독충과 맹수들이 가득한 밀림속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기겁하였으나 순은 의연하게 길을 나아갔다. 갑자기 후끈후끈한 광풍이 몰아닥쳤다. 일행이 모두 혼비백산하였지만 순은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순은 강인한 정신과 의지력으로 요임금의 명을 완수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일을 『 서경 』에서는 “납우대록(納于大麓)하신대 열풍뇌우(烈風雷雨)에 불미(不迷)하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사업을 해나가는데 있어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업의 과정이 순탄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비바람이 앞길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순임금이 열풍뇌우가 몰아치는 순간에도 정신을 잃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 것처럼 우리도 어떤 난관과 고초가 닥쳐도 정심(正心)을 유지하여 나아갈 때 원하는바 목적이 달성될 것이다.


2. 禹步相催登陽明 우보상최 등양명

우보(禹步)는 우보(牛步)라고도 하며 소걸음처럼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즉, 대개 두발이 서로 만나지 않고 서로 따르며 걷는 보법을 일러 우보법이라 한다. 이것을 우보상최(禹步相催)라 한다. 상최(相催)는 서로 따르며 재촉한다는 의미이다.


도가의 저서 중 『 포박자 』에는 우보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바로 서서 오른발을 앞에 두고 왼발을 뒤에 둔다. 다음 다시 오른발을 앞에 놓고, 왼발로써 오른발을 따르게 한다. 이것이 일보(一步)이다. 다음에 다시 오른발을 앞에, 다음 왼발을 앞에 두고 오른발로써 왼발을 따르게 한다. 이것이 이보(二步)이다. 다음 다시 오른발을 앞에  두고, 왼발로써 오른발을 따르게 한다. 이것이 삼보(三步)이다. 이와 같은 것이 우보(禹步)의 도화(道華)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 동신팔제원변법(洞神八帝元變法) 』에 보면 “우보(禹步)란 하우(夏禹)가 부린 술(術)이며 귀신을 불러서 부리는 행보(行步)로서 만술(萬術)의 근원이며 현기(玄機)의 요지(要旨)로 여겨진다.


옛날 우가 치수를 할 때 높이와 깊이를 예측할 수 없어서 해약(海若 : 해신-북해신)과 지기(地祇 : 토지신)를 불러 판별하였다. 항상 그 보(步)를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입술(入術)하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우보법은 우임금이 치수사업을 할 때에 사용했던 행보법으로, 그 걸음걸이가 마치 칠성의 7개별을 따라서 걷는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증산성사께서 칠성경을 백지에 종서하고 그 끝에‘우보 상최 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라 횡서하신 것이나 ‘천회지전보칠성 우보상최등양명(天回地轉步七星 禹步相催登陽明)’-하늘이 돌고 땅이 도는 것은 칠성의 걸음걸이 때문이다. 서로 재촉하는 우의 걸음[우보상최]은 세상을 밝게 비치게 만들었다-이라고 하신 것도 우보법이 칠성의 행보와 같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은 탐랑ㆍ문곡ㆍ거문ㆍ녹존ㆍ염정ㆍ무곡ㆍ파군의 일곱별로서 천지를 운행케 하고 천체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칠성의 행보에 의해 인간은 복록과 수명을 부여 받게 되는 것이다. 칠성이 행보하여 천지를 다스리므로 만물이 복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禹)는 우보법으로써 9년 홍수에서 치수를 하여 천하를 밝게 만들어 만백성을 구하였으므로 순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북두칠성은 탐랑ㆍ문곡ㆍ거문ㆍ녹존ㆍ염정ㆍ무곡ㆍ파군의 일곱별로서 천지를 운행케 하고 천체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칠성의 행보에 의해 인간은 복록과 수명을 부여 받게 되는 것이다. 칠성이 행보하여 천지를 다스리므로 만물이 복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禹)는 우보법으로써 9년 홍수에서 치수를 하여 천하를 밝게 만들어 만백성을 구하였으므로 순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운영자 2009-06-01 (월) 04:02


허미수와 강선루

허목(許穆)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문보(文甫),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선조 28년 12월 11일 인시에 서울 청선방에서 아버지 현감 교(喬)와 임제(林悌)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615년(광해군 7년) 정언웅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아버지가 거창 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衛)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30세에 광주(廣州) 쇠내에 은거하며 자봉산(姿峰山)에 들어가서 공부했는데, 어릴 때 배운 전서(篆書)를 이 시절에 서체를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효종이 승하하자 예론으로 우암 등과 대결하였다. 인조(仁祖)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인조에게 독살되고, 둘째 아들인 효종(孝宗)이 왕통을 계승했다. 그 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조씨가 효종을 위하여 몇 년 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을 기해예송(己亥禮頌 1669)이라고 한다.


기해복제(己亥服制)에 문제가 된 것은 효종이 가통(家統)으로 보면 차자(次子)가 되고 왕통(王統)으로 보면 적자(嫡子)가 되므로, 어느 쪽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복 입는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1년 복을 주장했고 윤휴와 허목은 3년 복을 주장하여 예송이 제기되었다. 논재에서 패하여 삼척부사로 쫓겨났다.


이때 저 유명한 속칭 퇴조비(退潮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동해의 조수간만이 약간 있었는데 파도가 매우 심하여 삼척읍내까지 올라왔으며, 여름철 홍수가 나면 오십천(五十川)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매우 심했다. 그래서 미수가 글을 짓고 비를 세워 조수를 진정시켰다고 한다.


한편 그는 이기론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理)는 기(氣)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미수는 남인에 속하는 인물로서 서인이던 우암 송시열의 예론(禮論)에 관련된 논쟁이 유명하다. 그의 사후 1688년 관직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纂), 미수기언(眉 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를 봉안한 미강(米糠)서원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전경에는 허미수와 관련된 다음의 구절이 있다.『상제께서 동곡에 머무실 때 그 동리의 주막집 주인 김사명(金士明)은 그의 아들 성옥(成玉)이 급병으로 죽은 것을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도저히 살 가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업고 동곡 약방으로 찾아 왔도다. 상제께서 미리 아시고「약방의 운이 비색 하여 죽은 자를 업고 오는 도다」고 말씀 하시니라. 성옥의 모는 시체를 상제 앞에 눕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 주시기를 애원하므로 상제께서 웃으시며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히고 배를 밀어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미수를 시켜 우암(尤庵)을 불러라」고 외치고 침을 흘려 죽은 아이의 입에 넣어주시니 그 아이는 곧 항문으로부터 시추물을 쏟고 소리를 치며 깨어 나니라. 그리고 그 아이는 미음을 받아 마시고 나서 걸어서 제 집으로 돌아 가니라.』 (제생 9절)


허미수와 송우암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우암이 미수에게 문약(問藥)한 일이 있었다. 아들을 시켜 미수를 찾아가서 자기 병세를 상세하게 고하고 약방문을 내어달라고 청했다. 우암도 약방문을 못 내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미수 외에는 자기 병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 미수가 우암에 대한 아들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비상 세푼을 정화수에 탕하여 춘부장께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우암의 아들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비상 세 푼이라니 먹고 죽으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아버지가 걱정되어 『더 좋은 약은 없을까요?』하니 그제 서야 미수가 필묵을 꺼내더니 초제(草劑)로 약방문을 적어서 아무 말 없이 건네주었다. 아들은 인사를 올리고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 우암께 그 글을 올렸다. 우암이 죽 훑어보고 하는 말이『선생님께서 아무 말 없으시더냐?』하셨다. 그제 서야 전후 사정을 자세히 고했다. 그러자 우암이『그러면 그렇지. 역시 미수다워』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러면서 약장에서 비상 세 푼을 내어 미수 어른께서 시키는 대로 다려 오라고 했다. 우암이 비상 세 푼의 약방문을 자기도 마음속에 내어놓고 혹시나 하여 미수선생님께 보냈던 것이라 한다.


이 얘기는 비록 정치상의 의견대립은 있을 수 있어도 인명에 관한 의술에는 의견을 달리할 수 없었던 것과 인간적으로 물약 할 만큼 알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한다. 우암이 세자 책봉의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약을 받게 되었는데 금부도사가 사약을 올리자 하는 말이 『이 약은 내가 먹어서는 죽지 않아』하였다. 관원은 죽지 아니하면 자신이 난감한 일을 당해야 하는 처지라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우암이 『자네야 무슨 죄가 있나. 나의 항문(肛門)을 막아라』하였다. 솜으로 항문을 꼭꼭 막자 약사발을 마시고 누워서 고생 고생하다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제께서 미수를 시켜 우암을 부르라고 했던 것은 우암의 막힌 항문을 뚫어 주는 공사를 보기 위함이다 그 후 아이의 항문으로부터 시춧물을 쏟아져 제생되었다.


그리고 상제께서 농암에서 공사를 행할 때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허 미수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의 일만 이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金剛山) 일만 이천 봉은 겁기가 붙어 있으니 이제 그 겁기를 제거하리라』하시고 『네가 김 광찬, 신 원일과 함께 일방 촌씩 오려서 시(侍)자를 써서 네 벽에 붙이되 한 사람이 하루 사백 자씩 열흘에 쓰라. 그리고 그 동안 조석으로 청수 한 동이씩 길어 스물 네 그릇으로 나누어 놓고 밤에 칠성경(七星經) 삼칠편을 염송하라』명 하시니라.

『형렬은 명을 좇았으되 신원일이 즐거이 행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 아뢰이니 상제께서는「정읍 이 도삼을 불러서 행하라」분부 하시니라. 형렬은 그를 데려다가 열흘 동안 분부대로 행한 후에 김 갑칠을 보내어 일을 마쳤음을 상제께 아뢰게 하였더니 상제께서 갑칠에게 양(羊) 한 마리를 사주며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공사 2장 13절)


허미수가 중수한 강선루는 성천읍 비류강 기슭에 있던 동명관(東明館)에 부속된 고려시대의 누각이다. 정자형(丁字形)평면을 이룬 31칸의 대규모 건물이다. 아래층에는 돌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사방에 개방된 누각이며 기둥머리에는 일출목(一出目) 삼익공(三翼工)을 쌓고 지붕은 팔각지붕으로 하고 지붕마루에 양성을 하였다. 삽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그리고 우물마루(짧은 널은 세로로 놓고 긴 널을 가로로 놓아 정(井)자 모양으로 짠 마루) 놓는데 귀틀 두 개 사이의 구역인 고물은 일만 이천 개라 한다. 그 고물 하나하나에는 녹줄이 붙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마루를 깔면서 온갖 정성을 깃들였으니 복록은 성경신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여진다.

 
 
운영자 2009-06-01 (월) 04:17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World War I)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 4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 포고로 시작되어(근본적 원인은 사라예보 사건) 8월 1일에 이르면 독일 제국의 대(對)러시아 선전 포고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이다.


이 전쟁은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정,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세계 전쟁)  [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II]

Second World War라고도 함.


세계 경제공황 후 모든 강대국들이 참여한 전쟁(1939~1945). 주요참전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이상 추축국[樞軸國])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이상 연합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둔 분쟁이 20년 동안의 불안한 잠복기를 거쳐 다시 폭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이었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개되었다(→ 색인 : 아시아, 아프리카). 제2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지정학적 역사의 분수령으로서,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000만~5,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동시에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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